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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화학물질 기사

"알 권리 보장 없는 화학물질 사용은 생체실험과 같다"

"알 권리 보장 없는 화학물질 사용은 생체실험과 같다"

올해도 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는 소식은 끊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4월까지 잠정 집계한 산재 사망자는 315명이다. 여기에는 4월 29일,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중대재해로 사망한 38명은 포함되지 않았다. 5월에도 목재소 파쇄기에 끼여 숨진 청년 노동자, 일하다 쓰러져 죽은 쿠팡 물류센터 계약직 노동자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죽음의 행렬을 막기 위한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는 21대 국회 개원에 즈음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노동자가 일하다 죽거나 다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법 제도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 금지 대책위원회'에서 위와 같은 활동의 일환으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다섯 편의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사업장의 안전보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위험이 있는지 알아야 노동자는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다. 그 대처란 작업할 때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회사에 적절한 예방조치를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위험을 모른다면? 이 모든 대처가 불가능하다. 그저 성실하게 일하면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UN 유해물질 특별보고관은 알 권리 보장 없는 화학물질 사용은 생체실험과도 같다고도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 상 노동자의 알 권리는 충분하지 않다. 특히 노조가 없거나 노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노동자 개인에게는 매우 제한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유해물질에 대한 알 권리 부분이다. 사업장의 유해물질에 대해 알고자 할 때 확인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로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어떤 유해물질에 얼마나 노출되는지가 담긴 문서)와 물질안전보건자료(물질에 어떤 유해성이 있으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담긴 문서)가 있다. 그런데 현행법 상 노동자 개인은 이 두 자료를 제공받을 권리가 없다. 산안법은 사업주에게 단지 사업장에 게시하라고 할 뿐, 노동자에게 자료를 제공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료확보작전'을 펼쳐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법적으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없으니, 노동자 본인이 직접 또는 동료를 통해 자료를 어떻게든 구해보려 노력한다. 자료를 구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면,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이런 '자료확보작전'은 그 자체도 비극이지만, 현실에는 작전수행을 어렵게 하는 다양한 방해물이 있다. 예를 들어 퇴직하거나 돌아가셔서 더 이상 사업장에 갈 수 없는 경우에는 취할 수 있는 작전이 거의 없다. 하청이나 직무 등의 이유로 업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반올림이 2014년부터 정보공개청구소송(삼성전자 공장에 대한 작업환경측정보고서) 싸움을 해온 것도 이런 '자료확보작전' 의 일부였다. 노동자로서 사업장에 자료를 요구할 권리가 없으니, 시민(피해자)으로서 공공기관에 자료를 요구한 것이다. 반올림은 안전보건자료는 영업비밀이 될 수 없고, 영업비밀이라 하더라도 노동자의 생명안전 보호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므로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2018년에는 승소판결로 일부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피해자의 알 권리를 부정하는 판단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주 최근인 5월 13일에도 패소판결이 하나 나왔다. 정보공개청구 패소판결들에는 결과를 떠나서도 정말 화가 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노동자가 자료를 요청하는 이유 자체를 부정해서, 노동자를 마치 생떼 쓰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법원은 유해물질 관련해서 교육도 듣고 사업장에서 오가면서 자료도 보았을 것이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한다. 또한, 산재 여부는 근로복지공단이 알아서 판정하는 것이니, 노동자가 유해물질 자료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자구책으로 '자료확보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 법원이 알권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에는 노동자의 알 권리는 없고, 사업주의 형식적인 의무만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알 권리를 통해 실제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그런 시늉만 내고 있다. 너무 부조리하고 무책임한 현실이다. 안전과 생명이 달린 문제에서 비밀은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의 알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하루빨리 법개정이 필요하다.

출처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811330818995?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